"공주님, 이제 나가 보시지요."
"알겠어요, 갑웃을."
갑옷을, 이라고 말했지만 그 갑옷이 있으나 마나한 형식뿐이라는 것은 그녀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시종이 가지고 오는 것은 상의 뿐인 체인메일과 어깨와 가슴, 등과 허리를 가리는 몇 장의 판갑. 예의상 입는 갑옷일 뿐이라는 느낌이다. 이런 철판보다는 오히려-
챠르륵소리가 나게 호버크에 팔을 꿰고 고리를 끼우며, 철판을 고정시키고 가죽끈을 꾸욱 조이는 짧은 시간,
-그러나, 갑옷을 입는다는 행위 자체가 가져다 주는 긴장감.
"건틀릿을,"
그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조이는 안감의 팽팽함과 함께 당겨지는 신경.
막사기둥에 기대어진 두개의 쇳덩이는 나의 검, 힘의 상징. 이것이야 말로 철판과 같은 검, 플레이트 소드.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나의 검이며 방패, 또한 갑옷이다.
"가자." 그리고 한 걸음.
어느새 뒤에는 열 명의 붉은 검사들. 가벼운 무장에 한자루 뿐인 검이지만 그녀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검. 그들에게 떨어진 가벼운 한마디 말에 보이지 않는 먹이를 눈 앞에 둔 것 처럼 눈이 빛난다.
그녀가 달려나가며 팔을 교차시켰다 밖으로 뿌린다. 검을 날개처럼 편다.
그 뒤를 잇는 것은 붉은 기러기 떼의 날개깃. 열 한명의 검사가 펼치는 쐐기꼴 진형, 죽기를 각오한 것인가? 그러나 빠르게 달려가는 그들의 얼굴엔 죽음의 주저따윈 없다.
순식간에 가까운 교전지역에 돌입하고 눈 앞의 적병에게 긴장시켜두었던 양 팔의 힘을 뿜어낸다. 언제나 기본에 충실하게 손목은 강철같이, 팔꿈치는 표범과 같이, 어깨는 대지에 뿌리박은 나무. 그대로 팔을 교차해서 스윙, 눈 앞의 적인 순간 세 토막이 난다.
오른팔에 무게를 싣고 반회전, 좌검을 들어 올리며 동시에 차징. 방금 전까지 적병이었던 파편이 생명을 잃고 가속과 회전에 말려 멀어진다. 녹청빛 머리에 튀는 붉은 피. 바다빛 머리에 생명의 물. 눈을 살짝 떨어 핏물을 털어내고 양손을 빠르게 내리긋는다. 철갑도 방패도 그 뒤에 숨은 연약한 육신도 우그러뜨리고 찢어 발기고, 허공에 날리는 철편과 혈편, 작혹한 노래의 뒤를 따르는 녹청빛의 춤사위.
"마, 마녀다? 검의 마...!"
서걱-!
입은 웃지 않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
'검의 마녀' 적들이 그녀를 부르는 이름.
'그러나, 나는, 나는 전쟁터의 검후, 녹색의 바람, 녹생의 광풍!'
더욱 거센 바람이 분다.
팍팍,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바람이 멎었다.
시체더미에 칼을 꽂아 놓고 거기에 기대어 우리를 바라보는-괴물들.
맨 앞에서 거만하게 허리를 젖히고 서 있는-...마녀, 비웃으려는 걸까? 아니, 그저 무의미한 눈길을 던질 뿐, 11쌍의 눈동자. 무신경한 눈들, 살인자들, 그들 앞에서 우리 손에 묻은 피는 잊어버린 채...그저 눈앞의 '괴물'들을 바라볼 뿐.
분명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었다. 한 순간, 적의 병영 앞까지 짖쳐들어 모든 면에서 승기를 잡은 그 순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저들이 아군 진형의 모서리를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베고, 쳐내고, 단순해서 소름끼치는 공격, 그러나 검도 방패도 베어내고 날려보내는 공격. 한범씩 검이 궤적을 그으면 그 뒤에 수십의 목숨이 달아났다. 사신. 뒷걸음질치며, 동료들의 죽음을 봐야만 했다.
순간, 피어오르는 말발굽소리, 기마병! 우리를 지원하러 기사들이 왔다! 죽음 앞에서도 아니 그래서 더욱 절실한 살았다는 느낌, 역설적 기쁨! 말발굽에 짖이겨져 죽어가는 동료들 따윈 잊기에 충분한...기쁨 말이다.
랜스를 누이고 지지대에 걸고, 손을 바투잡고 일순을 위해 영원같은 긴장! 갑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채 돌진하는 정신빠진 무리. 맨 앞은 마녀로 소문이 자자한 여자! 적어도 한번은 막아낼지 모르지만! 여자쯤이야! 표적을 재확인하고! 그리고-!
벼락같은 금속음 속에 거짓같은 정적, 그리고 육체가 우그러지는 소리, 어느새 그 '마녀'의 검이 랜스를 후려갈겼다. 몸통 뒤로 허용된 범위를 넘어 팔이 돌아가며 기성을 내뱉는다. 하지만 그는, 비명의 자유조차 누리지 못했다. 어느새 오른쪽에서 뒤따라온 검이 그의 애마와 그를 동기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끊어지는 의식과 함께 생각했을까? 그런 무장으로 이렇게나 전쟁터를 휘저을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능력, 무력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음을. 아니마드 청옥기사단의 제4단주의 의식은 그렇게 박탈당했다.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고 계속이었다. 똑같은 표정, 똑같은 동작, 그러나 똑같지 않은 그들의 검은 기사단들도 막지 못했다.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 바닥에 깔린 핏빛 양탄자, 그 위에 점점이 빛나는 것은 피로 빛나는 방패, 주인의 손길 아래 길이 잘 들었던 갑옷과 검들은 어느새 부수어져 허무한 비상으로 하늘을 수놓고, 찬란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은빛 붉은 무대에 피어오른 것은 에메랄드 빛 죽음이라는 이름의 꽃, 그래서 차라리 아름다운 꽃.
"쏴, 쏴라! 쏴!"
황급빝 술이 꽂힌 투구를 쓴 자가 외쳤다.
하늘을 다시 한 번 화살이 뒤덮는다. 자유를 얻은 비상, 그러나 다시 찾아오는 구속. 벗어나려는 욕망은 무산되고 그 아쉬움은 오히려 아군의 품을 향한다. 그 등 뒤의 괴물들을 상처 입힐 수가 없다! 저 검을 뚫을 수가 없다! 그 검사이를 뚫는 것은 고작 식어버린 육체의 파편. 이리 떼에 몰린 양 떼들처럼 야수들 앞에 선 그들은 떨고, 한 보병은 죽기 전에 미소지었다.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의 생각 대신에 돌격을 종용하던 저 재수 없는 지휘관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먹을 것도 잠자리도 살아온 삶은 달랐지만 죽음만은 공형하게, 일검-.
미소 띈 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차이고, 밟힌다. 튀어 오르는 회색빛. 피, 살육이, 전쟁이 그치려면 아직 멀었다. '학살' 그 속에서 살아남는 자는 그 행운에 기뻐 떨 수 있을까?
그것이 이틀전이었다. 해가 지고 뜨고, 다시 지고 뜨고.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도 전혀 지친 틈이 보이지 않았다. 눈 앞의 저들은 전투를 위해 태어난 괴물들, 그러나 우리에겐 검을 들 힘이 없었다. 용기조차도 없었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가라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는 달라. 저들의 눈은, 그래. 마치 죽은 생선같은, 꼴보기도 싫어.
피가 튀어 더욱 더 비현실적인 그녀의 얼굴, 자그마한 입술이 열렸다.
"더 싸울건가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살려주려는 걸까? 포로들의 눈빛이 절박해진다. 소리없이 술렁인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그들사이에 고위장교는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가 이부대 저부대 섞인 패잔병의 혼성부대. 슬며시 한 사람이 무리 밖으로 밀려난다.
깊게 패인 주름과 굽은 어깨, 억지로 징집된 것이 분명한 50대 중반 즈음의 한 사내. 무심히 내던지는 듯한 시선에 더욱 머뭇거리며 대답한다.
"아닙니다! 어찌,"
"그런가요?"
그녀의 검처럼 내리 자르는 목소리.
"잘 들으세요, 내 이름은 카레이오스 미론 룬트헬, 우리는 녹색의 붉은 바람."
"예, 예?"
"그럼."
얼마전부터 계속 그랬던 이이다. 할말만 하고는 돌아서 버린다. 떠나버린 뒤에 살았다는 기쁨도 잠시, 둘러본 주위에는 목을 잃은 아군의 시체만이 가득했다.
최근 덧글